김정란은 이 땅의 여성시인으로서의 시적 한계를 돌파하고 있다. 김정란의 시가 의미를 갖는 것은 한국시의 여성주의적 전통을 따르는 척하면서 그것을 뒤집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를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는"정체성, 존재론, 전망"이 될 것이다.『다시 시작하는 나비』로부터 시작되는 김정란의 시들은 낯선 서구의 이미지, 지나친 생략법, 난해한 의미 등에서 비롯되는 불유쾌함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외관과 다르게 그 이미지들은 복잡하지 않으며, 오히려 단순하다.
김정란 시의 근간을 이루는 두 이미지의 대립은 결국 이상과 현실의 대립으로 치환되는데 김현은 그 대립을 "딱딱함과 가벼움"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하였다. 김정란은 '긍정적인 것은 가벼운 것으로, 부정적인 것은 딱딱한 것으로 상상'한다. 김정란 시의 특징은 이러한 상상력을 통한 여성의 정체성 발견에 있다. 여성의 상처로부터 흐르는 눈물은 억압된 생을 지워낼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침범해 있는 억압의 도구들도 함께 녹인다. 그래서 여자의 삶의 "맑은 생"(「멀리서 온 발자국」)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