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옥봉의 생애는 분명치 않으나 여러 가지를 상고하여 보면 조선조 명종 갑자년(1564)에 남편 조원(趙瑗)과 만났고 조원이 임진왜란 때 죽었다 하였으므로 1550 - 1600년 사이로 잡을 수 있다. 선조 연간의 시인으로 생몰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16세기 후반기에 시작 활동을 했다. 임진왜란에 순절하였다.
옥천 군수 李逢?의 서녀이다. 그는 성장하여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인인 운강(雲江) 조원(趙瑗)의 부실이 되었으나, "이 몸도 왕가의 자손이다"라고 시를 읊을 만큼 자신이 종실의 후예임을 자부했다.
옥봉은 시에 능하였다. 그의 시는 일찍 〈명시종(明詩綜)〉, 〈열조시집(列朝詩集)〉, 〈명원시귀(名媛詩歸)〉 등에 실려 중국에 알려졌으며, 일설에는 시집 1권이 전하고 있다고 하나 국내에 전해오는 문집은 없다. 다만 33 수의 시가 실린 그의 문집 『玉峰集』은 조씨 가문의 문집인 『가림세고(嘉林世稿)』에 부록으로 되어 있다. 작품으로는 登樓(樓上이 〈〈明詩別裁〉〉에는 登樓로), 樓上(〈〈列朝詩集〉〉, 〈登樓〉로), 自適, 秋思, 歸來亭, 詠雪, 秋限, 〈班竹怨〉, 採蓮曲, 詠燕, 〈夢〉, 〈鷄鳴〉, 苦別離, 謝徐牧使益小室惠題額大字, 春日有懷, 癸未北亂, 秋限, 贈兵使, 自述, 寧越道中, 七夕, 閨情, 呼韻贈妓, 詠梨花, 雨, 閨情, 贈嫡子, 爲人訟 , 離怨, 賦雲江公除槐山, 初月, 謝人來訪, 玉峰家小池, 寶泉灘卽事, 岐上鵲, 憑欄, 聽鷄, 倚樓, 春曉, 江頭, 夢, 離恨, 新凉, 秋夜, 別恨, 採蓮曲, 送人往려江, 卽事(李玉峰集과 嘉林世稿(부록 편)에는 〈漫興贈郞〉으로, 〈〈列朝詩集〉〉에는 〈 興贈郞〉으로 되어 있다)이 전한다.
허균을 비롯한 여러 문인들이 詩話 속에서 그의 시를 칭찬하였다. 허균은 이옥봉의 시가 "맑고 장엄하여 아녀자의 연약한 분위기가 없다"고 평하했다. 『소화시평(小華詩評』에서 홍만종은 이옥봉이 국조(國朝) 제일의 시인이라 칭송된다고 하했다. 이수광(李 光)은 옥봉의 시 세 편을 소개하며 '아름답다'고 평했으며, 『지봉유설(芝峰類說』에는 이씨가 소를 훔친 남편 대신 옥에 갖히게 된 어떤 시골 아낙을 위해 소장을 써 주면서 끝에 "첩의 몸은 직녀가 아니데 남편이 어찌 견우이겠습니까"라는 시를 부기하여, 결국 이를 기이하게 여긴 태수에 의해 석방되었다는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옥봉은 이 사건 때문에 남편에게 쫓겨난 것으로 전한다.
그는 한국문학사상 여성 영웅으로서 '홍일점'이라 칭하는 허초희(허난설헌)에 비견되는 대가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