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씨는 아버지 경당선생(敬堂先生) 장흥효(張興孝)와 어머니 안동 권씨의 유일한 자손으로 안동부 금계리 사람이다. 이시명(李時明)에게 시집 가 슬하에 6남 2녀를 두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부친에게 글을 배웠다. 시, 글씨, 그림에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청풍자(淸風子) 정윤목(鄭允穆)이 장씨가 적벽부를 쓴 것을 보고 "글씨가 호탕하고 굳센 것이 동인의 서법이 아니니 중국인의 수적(水蹟)이 아닌가"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15세가 되자 시를 짓고 글씨를 쓰는 것은 여자에게 마땅한 일이 아니라고 하여 돌아보지 않아 지금 전하는 것은 많지 않다.
시 7편과 한문 편지 1편이 남아있다. 시는, 장씨의 고모부가 부역에 나가자 그 모친이 슬펴하여 기절한 일을 듣고 지은 4언고시 학발삼장(鶴髮三章), 성인의 시대에 나지 않았어도 성인의 말을 들을 수 있고 성인의 마음을 알 수 있다는 내용을 담은 성인음(聖人吟), 비오는 소리를 듣고 지은 소소음(蕭蕭吟), 자신의 몸을 조심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경신음(敬身吟) 등 오언절구와 손자 신급(新及)과 성급(聖及)에게 주는 오언절구, 장수하는 것을 노래한 칠언절구 희우시(稀又詩) 등이다. 아들이 병이 났다는 것을 듣고 쓴 한문편지도 있다. 대다수 왕실의 여인들도 일상의 문안편지는 언문편지를 이용한 것과 비교하면 매우 드문 경우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