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3-1589 본관은 양천(陽川)이고, 본명은 초희(礎嬉)이며 자는 경번(景樊), 호는 난설헌임. 1563(명종18)년에 강릉 초당 생가에서 초당 허엽의 셋째 딸로 태어남. 봉(封)의 동생이며 균(筠)의 누이임. 천재적 가문에서 성장하면서 어릴 때 오빠와 동생 사이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으며, 아름다운 용모와 천품이 뛰어나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짓는 등 신동으로 칭송되었음. 이달에게 시를 배웠으며, 15세 무렵 안동김씨 성립과 혼인하였으나 원만한 부부가 되지 못하였다 함. 남편은 급제한 뒤 관직에 나갔으나, 가정의 즐거움보다 노류장화(路柳薔花)의 풍류를 즐겼다고 함. 고부간에 불화하여 시어머니와의 사이가 원만하지 않았으며, 사랑하던 남매를 잃은 뒤 뱃속의 아이까지 잃는 아픔을 겪었음. 친정집에 옥사(獄事)가 있었고, 동생 균마저 귀양 가는 등 비극의 연속으로 삶의 의욕을 잃고 책과 먹으로 고뇌를 달램. 23세(1585, 선조 17)에 자기의 죽음을 예언하는 시 「몽유광상산」을 지음. 1589(선조21)년 27세의 나이로 별세함.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 경수산에 묻혔음.
1590년(선조23)년 11월 남동생 허균이 친정에 흩어져 있던 난설헌의 시를 모으고, 자신이 암기하고 있던 것을 모아서 『난설헌집』초고를 만들고, 유성룡에게 서문을 받음. 1598(선조31)년 해 봄 정유재란 때 명나라에서 원정 나온 문인 오명제에게 허균이 난설헌의 시 200여 편을 보여줌. 이 시가 『조선시선』, 『열조시선』등에 실림. 동생 허균이 1606(선조39)년 3월 27일 중국사신 주지번, 양유년 등에게 난설헌의 시를 모아서 전해주어 줌. 1607(선조 40)년 4월 허균이 『난설헌집』을 목판본으로 출판하고, 발문은 태안 피향당에서 지음. 1711년 일본에서 분다이야 지로베이에 의하여 『난설헌집』이 간행되고 애송됨. 1606(선조 39)년 『난설헌집』을 주지번에게 주고, 그녀가 죽고 나서 18년 뒤에 중국에서 출간되어 격찬을 받았음. 조선 봉건사회의 모순과 잇달은 가정의 참화로, 시 213수 가운데 속세를 떠나고 싶은 신선시가 128수나 됨.